바라트 자치령에는 도서관, 박물관, 학교와 같은 관공서 등지에 알레 하이네센의 동상들이 몇몇 남아 있다. 멸망해버린 나라의 국부는 수치스럽게 전시된다. 국부(局部)처럼.
작금에 방치된 채 흉물스럽게 있는 것들은 철거될 뿐, 그 자리에는 새로운 조형이 들어서지 못한다. 도시 재생에서 있어서 적절한 철거는 도시 환경과 조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는 오랫동안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790년대 즈음부터 자유행성동맹 말미에는 그러한 조형물을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멸망하고서 제국군이 들어와서는 그러한 핵심적인 사상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에 탄압을 가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것은 '사상적으로 건전한'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명목에 굳이 덧붙여서 양 웬리 일당을 제거하기 위한 무기를 만든다는 명목으로도 수거되었다. 무기를 제작하기에는 한없이 싸구려인데다 녹이 슬었고, 그러지 않아도 양 웬리와 그들의 전력차는 어마어마할진대, 그저 핑곗거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행성동맹 시민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그것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알레 하이네센 동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여튼, 바라트 조약에 의해 바라트 자치령이라는 이름이 그럭저럭 사람들에게 익숙해지자, 갑자기 중요해진 알레 하이네센의 등신대 동상들은 정부에서 지하조직을 계승한 시민단체와의 협의를 여러 차례 거쳐야만 했다. 존재 의미가 크지 않다는 것이 공청회를 통해 설득되자 으스스하던 알레 하이네센 동상의 빈자리에는 어쩌다 예산이 남으면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조약돌들, 거적때기, 색색의 천들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결국 알레 하이네센의 동상은 인체 모형과 더불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여러 학생들에게 괴담의 소재로 요긴하게 쓰였으나, 이제 그 자리를 점점 잃고 만 것이다(!)
당초에, 양 웬리 동상은커녕 양 웬리의 사진조차 이제르론 공화정부에서 굉장히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고인이 전혀 알레 하이네센처럼 떠받들어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 분명하고, 명백하고, 확정적인 사실임이 하나의 이유였다. 때문에 총회의장, 중앙위원회, 주석 집무실, 혁명군 사령부. 그 4곳은 그의 사진이 알레 하이네센과 같이 유일하게 걸려있는 곳이었다.
바라트 자치령 의회에서 알레 하이네센과 함께 양 웬리의 사진이 걸렸을 때, 비록 그가 군인이긴 하였으나 민주주의 존립 문제에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후에 자유행성동맹의 국시를 잇고자 양 웬리 원수가 노력했음은 이른바 '자치령 세대'와 '자치령 정신'에 가장 큰 논쟁을 발생시키는 주제로 자리매김했으나,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건은 의미 없는 동상의 건립이 지양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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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즈음이었다. 의회의사당에서 양 웬리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의 눈동자가 움직인다고 하는 소문이 퍼진 건.
올해로 34살이 된 레프 올코트는 의회의사당이 문을 닫은 때를 제외하고서 13년째 의회에 시설 관리 및 점검을 맡고 있었다. 남들이 거의 퇴근한 새벽에 올코트는 같이 일하는 완란과 모니터링을 하던 중, 국회의사당을 청소하는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되었다. 완란은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올코트가 먼저 현장에 가볼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올코트는 15분 뒤 기절한 채로 완란에 의해 발견되었던 것이다. CCTV를 살펴보아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겨우 깨어난 올코트는 양 웬리 사진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 다음 주 수요일, 자치령 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델게르무릉은 결혼반지를 의사당에서 잃어버렸다. 다시 출근 아닌 출근을 하니 한밤중이었기에 완란과 함께 동행했다. 그녀는 야근을 하는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 중간중간에 어슴푸레하게 켜진 전등에 안심하면서, 저번 주 일어난 괴기 소동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니, 인간이 우주로 진출한 지 천몇백 년인데 말이나 되나요. 문을 열면 양 웬리 얼굴이나 한번 봐요. 분명히 올코트 씨는 과로로 인해서 기절한 거고, 헛것을 본 거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고, 완란이 문을 열자 양 웬리의 사진이 걸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말마와 같은 비명. 야근하던 직원들은 고함에 밑으로 내려왔고, 완란과 델게르무릉은 기절한 채로 발견되었다.
몇 개월 간격을 두고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양 원수 사진을 임시방편으로 떼어 놓자는 논의가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적 들었던 '걸어다니는 알레 하이네센 동상'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양 웬리의 눈동자는 움직이는데, 알레 하이네센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그의 영혼이 이미 자유행성동맹이 망할 때 같이 떠났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제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양 제독만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텐보로는 아주 잠시 동안, 옛날의 그 시절처럼, 킬킬대며 웃었다.
어쨌건 영적 체험 소동은 떼어 놓을 수는 없지만 새롭게 인쇄한 사진으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국회의사당 불을 24시간 환하게 켜기로 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것은 후대에 전통으로 확립되었지만, 그 이유는 암암리에 전해질 뿐이었다. 3900년에 새롭게 발간된 구 의사당 안내 소책자를 보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공간은 언제나 밝아야 한다나 뭐라나.)
율리안 민츠는 이쯤 되면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의회 의장을 통해 기존에 걸려 있던 사진을 받아 왔다. 그리고서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이 원래 헛것을 본 것인지, 아니면 율리안 민츠에게는 나타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빛바랜 사진은 살짝 미소를 띈 채로 율리안을 응시했다. 너무나도 그립고, 익숙한 그 얼굴. 그러나 눈동자가 움직인다든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독님. 보고 계신 것 맞지요?"
6월 1일은 언제나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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